스미스가 본 국방과 사법의 경제적 가치 (국부론-연재30)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가 실제로는 정부의 역할을 적극 옹호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자유시장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가 왜 국방과 사법 시스템에 대해서만큼은 정부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치안과 국가 안보의 경제적 가치를 스미스의 시각으로 재조명해보겠습니다.

1. 애덤 스미스의 정부 역할론 개요
많은 사람들이 애덤 스미스를 '작은 정부' 이론가로 오해하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핵심적 역할을 명확하게 정의한 학자입니다. 그의 대표작 『국부론』(1776)에서 스미스는 정부가 담당해야 할 세 가지 핵심 기능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외침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국방입니다.
둘째, 사회 구성원들 간의 불의와 압제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사법입니다.
셋째,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 제공하기 어려운 공공사업과 공공기관의 설립과 유지입니다.
스미스가 보기에 이 세 영역은 시장 메커니즘만으로는 충분히 공급될 수 없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국방과 사법은 경제 활동의 기본 전제 조건이자, 모든 경제적 번영의 토대라고 강조했습니다.
2. 국방의 경제적 필요성과 가치
스미스는 국방을 단순히 군사적 필요가 아닌 경제적 번영의 필수 요소로 보았습니다. 외침의 위협이 없어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경제 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리였습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우리는 이 교훈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우크라이나의 모든 경제 활동이 마비되었고, 전 세계 곡물과 에너지 시장이 요동쳤습니다. 평상시에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국가 안보가 흔들리는 순간 경제 시스템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스미스는 또한 국방비를 '생산적이지 않은 지출'이라고 비판하는 시각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군대와 국방 시설은 직접적으로 상품을 생산하지는 않지만, 모든 생산 활동이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생산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단 상황에서 국방비 지출이 상당하지만, 이것이 있었기에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사법 시스템의 경제적 기능
사법 시스템에 대한 스미스의 통찰은 더욱 정교합니다. 그는 사법부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 경제 주체들 간의 계약을 보장하고 재산권을 보호하는 핵심 기능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온라인 쇼핑을 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판매자에게 돈을 미리 지불하고 상품을 기다리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배송이 안 되거나 가짜 상품을 받으면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미스는 이런 신뢰야말로 시장경제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계약이 지켜지지 않거나 재산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장기적인 투자나 거래를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법 시스템이 이런 신뢰의 제도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법치주의가 약한 국가들은 경제 발전이 더디고, 해외 투자도 잘 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투명하고 공정한 사법 제도를 갖춘 국가들은 경제적으로도 번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공공재로서의 국방과 사법
스미스가 국방과 사법을 정부 영역으로 규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공공재(public goods)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공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비배제성입니다. 누군가 국방의 혜택을 받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비경합성입니다. 한 사람이 법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보호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시장에서는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사람이 국방과 사법의 혜택을 받지만, 비용은 지불하지 않으려고 할 유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 동료들과 야유회 비용을 걷을 때를 떠올려보세요. 모든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실제 비용을 내는 것은 꺼리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때 누군가는 강제적으로 비용을 걷어야 하는데, 국방과 사법의 경우 정부가 세금을 통해 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5. 시장 실패와 정부 개입의 정당성
스미스는 자유시장을 옹호했지만,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국방과 사법 영역에서는 시장 실패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만약 국방을 민간에 맡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부유한 지역은 강력한 보안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가난한 지역은 무방비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사회 전체의 안정을 해칠 뿐만 아니라, 결국 부유한 지역에도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사법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은 사람만 좋은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다면,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원칙이 무너집니다. 이는 사회 신뢰를 훼손하고, 결국 경제 시스템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것입니다.
스미스는 이런 외부효과와 형평성 문제 때문에 국방과 사법만큼은 정부가 직접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장의 효율성을 최대한 활용하되, 시장이 실패하는 영역에서는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논리였습니다.
6. 현대적 관점에서 본 스미스의 통찰
250년 전 스미스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오히려 경제가 복잡해지고 국제화가 진행될수록 그의 예견이 더욱 정확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이버 보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개인이나 기업이 아무리 강력한 보안 시스템을 갖춰도, 국가 차원의 사이버 공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북한의 해킹 공격이나 중국의 산업 스파이 활동에 대응하려면 국가 차원의 사이버 방어 체계가 필요합니다.
지적재산권 보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특허권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면, 혁신에 대한 유인이 사라집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도 스미스의 논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방역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대응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집단행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7. 국방과 사법 투자의 경제적 효과
스미스의 관점에서 보면, 국방과 사법에 대한 투자는 비용이 아니라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다지는 투자입니다.
우리나라 법원의 전자소송 시스템을 보세요. 초기 구축 비용은 상당했지만, 이제는 시간과 비용을 대폭 절약하면서 법적 분쟁을 더 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기업들의 거래 비용을 줄이고, 투자 결정을 더 빠르게 내릴 수 있게 도와줍니다.
국방 기술의 민간 전이도 중요한 경제적 효과입니다. GPS, 인터넷, 터치스크린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많은 기술들이 원래는 군사 목적으로 개발되었습니다. 국방 연구개발 투자가 민간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직접적인 비용을 훨씬 넘어섭니다.
사법부의 독립성과 전문성도 경제적 가치가 있습니다.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법 집행은 기업들의 장기적 투자를 촉진하고, 해외 투자자들의 신뢰를 높입니다. 실제로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한 나라의 법치주의 수준을 국가신용등급 평가의 중요 요소로 고려합니다.
8.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국방·사법의 가치
국방과 사법의 경제적 가치는 일상에서 쉽게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마치 공기처럼 있을 때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없으면 모든 것이 마비되는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택배를 받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집 앞까지 안전하게 물건이 배송되는 것은 치안이 잘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도로에 강도가 출몰하거나 택배 기사가 물건을 훔쳐 달아날 위험이 크다면, 온라인 쇼핑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신용카드로 결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카드 정보를 도용당해도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도적 신뢰가 없다면 현금 없는 사회로의 전환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부동산 거래에서는 더욱 명확합니다. 등기부등본이라는 공적 장부와 법원의 권위가 있기에 수억 원짜리 집을 안심하고 사고팔 수 있습니다. 만약 재산권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면, 누구도 장기적인 자산 투자를 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250년 전에 제시한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국방과 사법은 단순한 정부 지출이 아니라, 모든 경제 활동의 토대를 제공하는 핵심 인프라입니다.
물론 정부의 모든 개입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스미스가 명확히 구분했듯이, 시장이 제공할 수 없는 영역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음에 국방비 증액이나 사법부 예산 관련 뉴스를 접할 때, 단순히 '세금 낭비'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스미스의 관점에서 그 경제적 가치를 한 번 더 생각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경제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이 두 기둥의 소중함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