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역할: 아담 스미스가 본 정부의 3가지 임무 (국부론-연재21)
"정부는 경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많은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의 대표 주자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국부론』을 자세히 읽어보면, 스미스가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3가지 핵심 임무를 제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은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가 생각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아담 스미스의 정부관: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
아담 스미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이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유명한 이론이죠. 하지만 이것이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각자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 회사 전체의 성과가 올라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리자나 CEO가 필요 없다는 건 아니죠.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시장경제가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는 절대왕정이 막바지에 이르고 시민사회가 형성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지나치게 경제에 개입하여 오히려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정부의 역할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확히 구분하려 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다양한 사회 문제들 - 부동산 정책, 일자리 창출, 사회복지 등 - 을 보면서 "정부가 너무 많이 개입한다" 또는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상반된 의견을 자주 듣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스미스의 정부론은 여전히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2. 첫 번째 임무: 국방과 외침 방어
스미스가 제시한 정부의 첫 번째 임무는 국방입니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죠. 이는 개인이나 민간 기업이 절대 대신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사회를 보호하는 것, 즉 다른 독립적이고 문명화된 사회의 폭력과 침입으로부터 가능한 한 보호하는 것"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이는 현재로 치면 군대 운영, 무기 개발, 국경 관리 등을 포함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미스가 국방의 중요성을 경제적 관점에서도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안전한 환경이 보장되어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경제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는 논리였죠. 마치 우리가 치안이 좋은 동네에서 가게를 운영할 때 더 안심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현재도 국방비 지출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스미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정부가 반드시 투자해야 할 영역입니다. 다만 그는 전쟁이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화로운 방법으로 국가 안보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또한 스미스는 상비군의 필요성도 인정했습니다. 당시 많은 국가들이 전시에만 임시로 군대를 구성했는데, 그는 전문적이고 훈련된 상비군이 더 효율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군사 체계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3. 두 번째 임무: 사법 제도와 개인의 권리 보호
두 번째 임무는 사법 제도 운영과 개인의 권리 보호입니다. 스미스는 "사회의 각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의 불의나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거나, 정확한 사법 행정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법원을 운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계약의 이행을 보장하고, 재산권을 보호하며, 공정한 거래 환경을 조성하는 모든 활동이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할 때 안심하고 결제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약 위반 시 법적 구제 수단이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만약 사법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미래의 약속을 믿고 거래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미스는 특히 재산권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개인이 노력해서 얻은 것을 안전하게 소유할 수 있어야 더 열심히 일하고 투자할 동기가 생긴다는 논리였죠. 이는 현재 지적재산권 보호나 투자자 권리 보호와도 직결되는 개념입니다.
또한 그는 사법부의 독립성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판사가 정치적 압력이나 개인적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하게 판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보았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분쟁 - 부동산 계약 분쟁, 근로계약 위반, 소비자 피해 등 - 을 해결하는 것도 모두 이 두 번째 임무에 해당합니다.
4. 세 번째 임무: 공공사업과 공공기관 운영
세 번째 임무는 가장 복잡하면서도 현대적 의미를 갖는 영역입니다. 스미스는 "특정한 공공사업과 공공기관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사회에는 도움이 되지만 개별적으로는 수익을 낼 수 없는 사업이어야 합니다. 둘째, 민간이 운영하기에는 너무 큰 비용이 들거나 위험부담이 큰 사업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도로나 다리 건설을 생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도로를 민간 기업이 건설해서 수익을 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좋은 도로망은 경제 전체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이런 경우 정부가 나서서 건설하고 관리하는 것이 합리적이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미스는 기초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육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정부가 공교육 시스템을 운영하여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많은 공공 서비스들 - 지하철, 공원, 도서관, 병원 등 - 도 스미스의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영역들입니다. 민간이 운영하기에는 수익성이 떨어지지만 사회 전체에는 큰 도움이 되는 분야들이죠.
다만 스미스는 정부가 이런 사업을 운영할 때도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독점적 지위에 안주해서 비효율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리와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5. 현대 정부의 역할과 스미스 이론의 적용
스미스의 정부론을 현재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3가지 기본 임무는 여전히 현대 정부의 핵심 기능으로 남아있습니다.
국방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군사력뿐만 아니라 사이버 보안, 테러 방지 등 새로운 영역까지 확장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본 원칙은 동일합니다. 개인이나 민간 기업이 할 수 없는 국가 안보 업무를 정부가 담당한다는 것이죠.
사법 제도 역시 크게 발전했습니다. 스미스 시대보다 훨씬 정교하고 전문화된 법률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국제 거래나 디지털 경제 등 새로운 영역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세 번째 임무인 공공사업 영역입니다. 현재 정부는 스미스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회보장제도, 의료보험, 환경보호, 문화예술 지원 등이 그 예입니다.
이런 확장이 과연 스미스의 원칙에 부합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본소득제도나 대규모 복지정책에 대해 "정부 개입이 과도하다"는 입장과 "사회적 필요에 의한 당연한 조치"라는 입장이 대립하고 있죠.
하지만 스미스의 핵심 원칙 - 민간이 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일, 사회 전체에는 도움이 되지만 개별적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려운 일을 정부가 담당한다 - 은 여전히 유효한 판단 기준을 제공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을 생각해보세요. 백신 개발 지원, 방역체계 구축, 경제적 피해 지원 등은 모두 민간 영역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스미스의 원칙과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정부가 특정 기업을 과도하게 지원하거나, 시장에서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에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것은 스미스가 경계했던 부분입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가론은 단순한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와 시장의 적절한 역할 분담을 제시한 균형잡힌 관점입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정책 이슈들 - 부동산 정책부터 일자리 창출, 사회복지까지 - 를 판단할 때 스미스의 기준을 적용해보면 유용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개입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어떤 영역에서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를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부의 역할은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민간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효율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